칼럼

따뜻한 긍휼

기독선교신문 [등불]

미국 뉴욕 시장을 세 번이나 연임한 피오렐로 라 과디아가 뉴욕시 법원 판사로 재직할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상점에서 빵을 훔치다 붙잡힌 노인이 기소되었습니다. 노인은 배가 고파 우는 아이들을 위해 빵에 손을 댔다고 고백했습니다. 사건의 경위를 들은 라 과디아 판사는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이어서 “사정이 딱해도 남의 것을 훔친 행동은 잘못이므로 법대로 적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웃의 어려움을 방치한 시민들에게도 책임이 있으므로 제가 벌금 10달러를 내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더니 중절모를 재판부 서기에게 내주며 “이곳에 계신 분들도 나처럼 벌금을 내고 싶으면 이 모자에 넣으시기 바랍니다.” 하고 모자를 돌리게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가난한 노인은 벌금을 제외한 47달러를 받아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아무리 죄인의 사정이 딱하다 해도 판사의 입장에서는 법을 존중해야 합니다. 한편 그에게는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에 법을 지키면서도 노인을 구제할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긍휼의 지혜가 풍성하다면 삶이 더 아름답고 따뜻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긍휼 자체이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용서하지 않고 율법대로 처리하신다면 어느 누가 살아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시므로 우리가 회개할 기회를 얻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근본 하나님과 하나이신 주님의 마음 또한 긍휼 자체입니다. 마태복음 12:20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상한 갈대처럼 마음이 죄악에 심하게 물든 사람, 꺼져가는 심지처럼 구원의 가능성이 희박한 사람이라도 끝까지 참아 주셨습니다. 세리나 창기와 같이 멸시받던 죄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운 권능을 베풀며 선한 일만 행하셨는데 끝내 예수님을 대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팔아넘긴 사람도 있었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조차도 “너는 도무지 구원받지 못할 중심이구나.” 하고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는 하나님 마음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구원을 얻은 무수한 영혼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긍휼을 통해 맺으신 선한 열매’입니다.

많은 사람이 상대를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막상 자신의 유익에 맞지 않으면 싫어합니다. 또 어느 정도까지는 상대의 잘못을 수용하지만 그 이상을 넘어서면 외면하지요.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큰 긍휼을 입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죄로 인해 지옥에 떨어져 세세토록 고통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나무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용서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긍휼을 베풀어 주셨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사람이라면 과거에 잘못을 범한 사람이라도 ‘저 사람은 예전에 큰 실수를 한 적이 있지.’ 하고 두고두고 기억하며 싫어하지 말고 용서를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가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이후로는 진리 안에 살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합니다. 바로 우리에게 이런 긍휼이 풍성할 때 아름답고 따뜻한 사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태복음 9:13)

2024-01-12 | 기독선교신문 [등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