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두려움이나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지식이나 재물, 배경 등 내세울 것이 전혀 없어도 하나님을 믿고 온전히 의지한다면 모든 것을 채워 주시며 앞길을 책임져 주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랑일까요?
첫째, 주 안에서 날마다 변화되기를 기다려 주시는 사랑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보면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상속받아 집을 떠났는데 모두 허랑방탕하게 써 버리고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흉년까지 들어 갖은 고생을 하던 끝에 아버지께 가서 자신을 품꾼의 하나로 여겨 달라고 청하고자 집으로 돌아오지요. 이때 안타까이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저 멀리 아들의 형체가 보이자마자 알아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옷을 입혀 주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며 잔치까지 열어주지요.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 이러하십니다. 자녀들이 아무리 잘못을 범했을지라도 어찌하든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원하시지요. 중심으로 회개하기만 한다면 잔치를 벌여 아들을 맞아 주는 것처럼 은혜와 사랑, 축복을 부어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주 안에서 변화되기까지 오래 참아 주시는 사랑입니다.
기다림 안에는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이 소망이 간절한 만큼 오래 참을 수 있지요. 오래 참는다는 것은 그저 가만히 앉아서 원하는 대로 이뤄지기를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수고와 노력이 따르고 감당해야 할 몫이 있는 것이지요.
사랑의 하나님께서도 인간을 경작하시면서 많은 슬픔과 고통의 시간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사람이 진리로 변화되기 전에는 아무리 큰 체험을 하고 은혜를 입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쉽게 저버립니다. 당장 눈앞의 한 가지가 자기 생각에 안 맞으면 이전의 백 가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어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기억한다 해도 우연으로 돌리지요.
로마서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하셨듯이, 성도들이 연약해 진리인 하나님 말씀 가운데 살지 못할 때 우리 마음 안에 계신 성령님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아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경작을 하시는 긴 세월 동안 마음에 아픔들이 차곡차곡 쌓이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아픔을 감수하시면서도 오래 참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에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할 수 있었습니다(벧후 3:15).
셋째로, 우리가 주 안에서 변화될 것을 믿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오래 참고 기다릴 수 있는 이유는 바라는 대로 이뤄지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풍성한 열매를 거두리라고 믿지 않으면 씨를 뿌릴 수 없지요.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자녀가 잘 성장할 것을 믿기 때문에 낳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도 제자들은 이런저런 연약한 모습들이 있었지만, 앞으로 그들이 변화되어 순교의 사명까지 넉넉히 감당할 줄 믿으셨기 때문에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습니다.
사랑의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변화될 것을 믿으시기에 천국에서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깊은 사랑을 마음에 깨달아 어둠이 짙어지는 세상에서 그 사랑을 담대히 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한일서 4장 16절)
2025-07-25 | 기독선교신문 [등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