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9과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

읽을말씀 : 고후 10:18
외울말씀 : 고후 10:18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인정을 받는다면 참으로 기쁠 것입니다. 칭찬과 인정을 받는 자체가 이웃에게 뭔가 귀감이 되거나 덕이 되며 은혜를 끼칠 만한 것이 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칭찬과 인정을 받는다면 얼마나 기쁘고 축하받을 만한 일이겠습니까. 자신의 덕을 세우고 이웃에게 기림이 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님 앞에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되어 범사에 형통함을 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요?
   
   1.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행해야
   
   성경을 상고해 볼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마음이 선한 사람은 자신이 행한 선한 일이 드러나고 알려지면 오히려 부끄러워하고 민망히 여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17장에 나오는 바르실래를 예로 들 수 있는데, 그는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과 신하들의 배신으로 왕궁을 떠나 쫓기고 있던 때에 다윗 왕과 그의 군대에게 먹을 음식과 쉴 곳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반란이 진정된 후 예루살렘으로 환궁하던 다윗 왕은 그에게 동행해 줄 것을 제의하게 되는데, 이때 바르실래는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하여 민망히 여기고 좋은 말로 정중히 사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욕심이 없는 선한 마음이니 당연히 행할 바를 행한 것으로 여기고 보상받기를 부끄러워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으로 인해 왕에게 누(累)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참으로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자신의 착한 행실이 드러나는 것이 오히려 부끄럽고 민망한 일인 것입니다.
   반면에 마음이 악한 사람은 어떠합니까? 평소 행하지 않던 선한 일을 어쩌다가 한 번 행하기라도 하면, 아주 사소한 일임에도 사람 앞에 드러나기 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다 행한 선행이 스스로 보기에도 대견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것이 드러나고 남이 알아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한 행실이 드러나기를 원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그만큼 마음에 선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선을 베풀었다고 해도 그에 대한 축복이 임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인지, 아니면 외식인지를 깨달아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벗어 버려야 진정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고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2.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가 되려면
   
   1) 상대가 지키지 못한다 해서 지적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지켜 나갈 때 자신이 지키는 것으로 인해 상대의 티가 보이니 지적하고 나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심판할 권세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상대편에서 물어 오는 경우가 아니라면 지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도자로서의 사명이나 의무가 있는 경우에도 필요에 따라 설명해 줌으로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도록 할 따름이지 나무라거나 지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상대가 중심에서 지적 받기를 사모하며 원하는 경우에 한해서는 부득불 지적할 수 있지요.
   만일 내가 지킨다고 해서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지적하고 나무란다면 스스로 재판장이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머리되고 일꾼된 분일수록, 그리고 영으로 변화되어 가는 초보 단계에 있는 분들의 경우에 이런 일이 많은 것을 보게 되는데 삼가 주의해야 하지요.
   우리는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므로 정죄하거나 심판할 자격이 없으니(약 4:11) 언행 가운데 지적하는 말이 있어서는 안 되며, 다만 상대에게 설명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남의 티를 잡고 싶은 마음까지라도 철저히 버려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의와 화평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께서 칭찬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왜 자신이 지키는 것으로 인해 상대를 지적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일까요? 남을 지적하는 것은 바로 섬김의 마음이 아니라 섬김을 받으려 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섬긴다는 것은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기며 존중하는 마음인데 어떻게 티가 보이겠습니까? 설령 보인다 해도 보이는 그 자체가 괴로운 것이며, 더구나 상대의 약점을 들춰내거나 티를 말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고 더 나아가 무시하는 일이지요. 마음에 온전한 섬김이 있다면 그저 상대의 좋은 점만 보려 하고 좋은 점만 말하려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내세우거나 들레지 않으니 부딪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마 12:19-20).
   따라서 자신이 지킨다고 해서 남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 마음을 두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겸손히 섬기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2) 화를 내거나 다투지 아니하며 피차에 섬기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 중에도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노하고 감정 표현을 하거나 얼굴을 붉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을 대할 때 늘 부담스럽고 긴장을 하게 되지요. 더구나 질서상 윗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아랫사람들은 자신의 일도 감당하기 벅찬 상황에서 윗사람의 눈치까지 살피면서 일해야 하니 정신적인 피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윗사람의 신경이 날카롭다고 해서 눈치를 보며 힘들어하는 아랫사람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윗사람의 성격이 모나고 혹 부족하여 내 생각에 못 미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조직과 질서를 존중하며 그 속에서 서로가 합력하여 위로와 도움이 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따라서 윗사람이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다 해서 질서를 깨뜨리는 일은 합당치 못하다는 사실을 알아 기본적인 틀 안에서 서로 화목하고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벧전 2:18).
   아랫사람이 아무리 부림을 당한다 해도 마음이 선하면 고통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랫사람이 선하다 하여 윗사람이 무례히 행하거나 지적하고 가르치려 해서도 안 되지요. 다만 피차간에 무엇을 말할 때나 권면할 때, 또 무엇을 전할 때에도 가르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오직 섬기는 마음으로, 다만 아는 것을 말하려 하는 자세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서로 간에 섬김의 마음이 없으면 상대로 인해 불편해지고 때로 분을 내거나 악한 말을 하여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이는 상대에게 아픔을 줄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해가 되는 어리석은 일이지요. 그래서 야고보서 1:19-20에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내기를 더디 하라는 말은 마음속에 담아 두고 눌러 참았다가 나중에 성을 내라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이해하며 마음에 담아 두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상황에 따라 자기 보기에는 성내는 것이 정당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할 뿐이며, 성내는 자체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일이니 이러한 감정 자체를 버려야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들을 빼낼 때, 크고 온유한 마음이 되어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기쁜 일을 만나거나 지적을 받는다 해서 마음이 동요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이 동요된다는 것은 그만큼 작은 그릇이요, 작은 마음인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릇이 크고 작음에 따라 칭찬을 듣거나 지적을 받을 때의 마음 자세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예를 들어, 소인은 열 가지 칭찬을 들으면 칭찬을 들은 자체로 자신을 가누지 못하고 기뻐하지만, 대인은 열 가지 칭찬을 다 참조는 하되 그중에서 자신이 정말 칭찬받을 만한 일이 몇 가지나 있는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정말 칭찬받을 일로 칭찬을 받았다면 그것은 묻어 두고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칭찬받을 일이 아니었다면 도리어 개선할 점을 발견하여 개선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혹 그 칭찬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일이라면 중심에서 사양하려 할 것입니다.
   또한 소인은 열 가지 지적을 받으면 열 가지를 다 생각하면서 힘을 잃고 주저앉지만 대인은 지적해 준 자체는 감사하니 참조는 하되 힘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좇아 더 발전적인 것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족한 점을 발견하여 개선해 나가게 되지요.
   성경상에서도 하나님께서 큰 인물로 지칭하신 사람들을 보면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진리를 좇는 마음이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초연한 모습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이나 고넬료, 보아스 같은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지위나 쌓은 지식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선을 행함으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덕을 끼쳤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사랑과 존귀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어깨가 올라간다거나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으며, 또한 다른 사람에게 호되게 지적을 받는다 해도 의기소침해하거나 침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분야까지 돌아보아 돌이킬 것은 돌이키고 버릴 것은 버려 나가야 합니다.
   
   4) 마음에 서운함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가 애매히 고통을 주는 말, 또는 감정을 건드리는 말을 했다 할지라도 그런 것으로 마음이 동요되어 서운해하거나 감정을 품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 왕이 그랬습니다. 그가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가다가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 사울의 집 족속 중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과 그 일행을 향해 계속하여 저주하는 말을 합니다. 이에 신복들은 당장 달려가 시므이를 죽이겠노라고 격분했지만 다윗 왕은 내버려 두라고 만류하지요(삼하 16장).
   만일 다윗 왕이 소인배의 마음을 소유했다면 시므이의 저주에 감정이 상해서 그를 가만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 왕은 초연히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대인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다윗 왕처럼 대인의 마음을 가지면 불행한 일을 만났을 때에도 모든 상황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는 긍정적인 생각과 마음이 됩니다.
   사무엘하 16:12을 보면 다윗 왕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했지요. 상대가 나를 저주하는데 그에 맞서 앙갚음을 했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선으로 갚아 주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상대가 나를 저주했어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대할 때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서도 선으로 갚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큰 사람은 불행도 행복으로 바뀔 것을 생각하며 범사에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처럼 대인은 항상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마음을 가지며 좋은 행함을 보이게 되는데, 이것이 곧 주님 앞에 칭찬받을 만한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자기를 낮추고 상대를 섬기는 주님의 마음이 되어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향기와 빛을 발함으로 주께 칭찬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