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15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

읽을말씀 : 히 12:14
외울말씀 : 히 12:14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자녀들이 불화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시며 그런 사람들의 기도와 간구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어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만사형통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1.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무리 지식이 많고 재주가 뛰어나며 권세가 있다 해도 자신의 악으로 인해 범사에 화평을 이루지 못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기를 원하십니다.
   갈라디아서 5:22을 보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화평의 열매가 있고 마태복음 5:9에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말씀하셨지요. 또한 요한일서 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우리 죄를 위해 화목제물로 죽어 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모든 것에 화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2장에는 솔로몬의 뒤를 이어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자 백성들이 왕 앞에 나아와 건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솔로몬 왕 때에 과중했던 세금과 노역을 가볍게 해 달라고 요청을 한 것입니다. 이때 르호보암 왕은 "내 부친이 너희로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여 자기와 함께 자라난 소년들이 이른 악한 말로 백성들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이렇게 화평을 좇지 않고 악한 말에 동조하니 백성들의 마음이 왕에게서 떠나 결국 나라가 둘로 분열되는 비극을 낳고 말았습니다.
   다니엘을 모략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나라의 총리들과 방백들로서 권세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포로로 잡혀온 다니엘이 왕의 신임을 받고 높임을 받게 되자 이를 시기하여 다니엘을 없애려고 하다가 오히려 자신들이 사자밥이 되고 말았지요. 큰 나라에서 높은 위치에 있다 할지라도 화평을 이루지 못하고 악을 행하니 엄청난 화를 당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화평을 이루지 아니하면 분야 분야에 문제가 생기고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등 그 결과가 온전치 못한 것을 봅니다. 이는 부부 사이, 부모와 자녀 사이, 일터나 사업터 등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2.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을 좇으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고 지극히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애쓰며 하나님의 은총을 갈망하는 사람들 중에도 화평함의 분야에서 하나님 앞에 더 온전함을 입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사람들이 기본적인 화평함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열심히 말씀대로 살아가며 마음의 의를 이룬 만큼 기본적인 화평함은 당연히 임해 가는 것이지만 더 나아가 모든 일들을 크게 이루기 위한 화평함 곧 큰 그릇이 되기 위한 화평함을 소유해야 온전함을 입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모든 일들을 크게 이루기 위한 화평함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윗사람을 무시하거나 윗사람에게 허물이 되는 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신하가 임금의 어떤 잘못을 개선하도록 충언을 드린다면 어떤 방법을 좇아야 할까요? 임금을 개인적으로 찾아 뵙거나 서신을 통해 임금이 깨우치고 돌이킬 수 있도록 해 드리는 것이 바른 의가 될 것입니다.
   여러 신하들 앞에서 "그것은 옳지 못한 일이고 임금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아뢰었다면 아무리 충정어린 마음으로 간언했다 할지라도 임금은 신하들 앞에서 너무나 민망할 것입니다. 즉 그 의가 아무리 옳은 것 같아도 예를 갖추지 못하면 임금에게 누(累)가 되니 옳지 못하지요.
   가정에서나 이웃간에도, 직장에서 상사나 동료, 아랫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모든 일에 있어서 아무리 자기의 의견이 옳다 해도 무조건 밀고 나가는 것이 온전한 의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는 큰 그릇일수록, 큰 일들을 감당해 나가는 일꾼일수록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질서 가운데 상대에게 민망함을 주지 않고 이루어 갈 때 진정한 의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보기에 아무리 옳은 중심을 가지고 행했다 할지라도 결과가 화평 가운데 이뤄지지 않는다면 육적인 의로 끝나고 맙니다.
   믿음 안에서 마음의 의를 많이 이룬 사람일지라도 더 깊은 의 가운데 들어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경우는 대부분 이러한 분야에서 막혀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 개선해 나가면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물론 하나님께도 더 큰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원수를 맺어서는 안 됩니다
   마태복음 5:44에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원수 맺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비록 의 가운데 행해 나간다 할지라도 그것이 상대의 감정을 유발시켰을 때에는 일부러 원수를 맺으려 한 것이 아닌데 어쩔 수 없이 원수를 맺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무슨 원수 맺은 일이 있어서 사자굴이나 풀무불에 들어가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니엘이 너무나 진실하고 정직했기 때문에 그를 고소하여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도 다니엘에게서 어떠한 허물이나 흠도 찾을 수 없었지요. 그러자 결국 신앙적인 차원에서 계략을 꾸며 원수 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악한 사람들은 상대의 의가 드러나면 그것을 걸고 넘어짐으로 자신들의 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 마음에 의를 이룬 사람들도 타의에 의해서 할 수 없이 원수 맺어진 상황에서 어려움을 대처하고 풀어 나가는 데는 각각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는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 줄 만큼 악이 없었으나 돌에 맞아 죽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스데반이 악한 이들의 악을 담대하게 지적하고 드러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스데반의 행함은 의로운 것이요 결코 잘못 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지혜로써 악한 사람들의 궤계도 피해 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행하셨습니까?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언행이 온전하시니 누구에게든지 흠 잡힐 말씀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고 어느 누구에게도 실례를 범하는 일이 없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느 누구와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시고 의를 행하시되 주위의 모든 환경을 고요하게 평정해 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의를 이루어 가고 있다 할지라도 말이나 행동이 온전치 못한 분야 속에서 상대의 감정을 건드리거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걸려지는 문제 때문에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요, 진정한 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3) 상대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무시한다는 것은 어떤 존재에 대해서 눈여겨 보지 않거나 업신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생활 주변에서도 무시당하는 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무시하는 마음은 상대를 자신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는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임금이 자신의 권세를 가지고 신을 무시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던 경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벨사살 왕이 그러하지요. 그는 선왕 느부갓네살의 삶의 여정들을 통하여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목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대연회를 베푼 자리에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 온 금은 그릇으로 술을 마시고 바벨론의 우상들을 찬양하는 등 심히 패역한 죄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멸시함으로 강국이었던 바벨론과 벨사살 왕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해 하룻밤만에 멸망하고 말았지요.
   그러면 어떤 경우를 두고 무시한다고 하는 것일까요? 자기 나름대로 의롭고 자기 보기에 옳은 견해를 내세워 주장하며 억지로 상대를 납득시키려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상대편에서는 자기 의견이 묵살되었다고 생각하니 감정이 유발되는 것입니다. 내 편에서는 아무리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상대는 무시당했다고 생각하고 감정이 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그 방법이 옳지 못한 것이지요.
   흔히 무시당하는 사람의 입장은 정상적인 사람이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자격지심이 있어 예민하게 느끼며 무시당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선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고 설령 현저히 무시당했다 해도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그들을 악하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무시당하는 입장에서는 얼만큼 고통을 받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의 입장에 서서 이해해 줄 수 있는 마음이 바로 주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약자 편에서는 더 쉽게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먼저 된 사람이 그 사정을 헤아려 주고 더 신중히 행하여 상대가 힘들지 않도록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설령 남을 무시하려는 마음을 지니지 않았다 해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상대 편보다 더 낫게 여기다 보면 가르치려는 마음이 생기고 이것을 듣는 상대는 상대적으로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어떤 깨우침을 주고자 할 때도 가르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알려 주기 위하여 설명하는 자세이어야 합니다. 상대를 가르치려고 하는 그 자체를 마음에서 온전히 빼내 버리면 무시당했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이처럼 질서를 좇아 예의를 갖춘 의를 행하고 모든 언행을 온전케 하여 아무와도 원수맺지 않으며 상대를 무시하는 일을 행치 아니함으로 하나님 앞에 큰 그릇이 되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