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23과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읽을말씀 : 단 6:19-23
외울말씀 : 단 6:22

우리 속담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에는 무슨 일이 잘못되었을 때 상대의 탓으로 돌리려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반성해 보아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자기 탓으로 돌리면 당장은 불이익을 당하는 것 같지만 시간이 흘러 진실이 밝혀지면 상대의 마음은 물론 더욱 큰 신뢰와 존경을 얻게 되지요.
   반대로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린 경우에 당장은 이익이 되는 것 같지만 결과는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끝나기도 하고 엉뚱한 사람이 누명을 쓰거나 해를 당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믿음의 선진 다니엘의 모습을 통해 남을 탓하거나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1. 신앙의 정도(正道)를 걸은 다니엘
   
   다니엘은 남왕국 유다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침입을 받게 되었을 때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유다 지파의 왕족이었습니다. 바벨론 왕은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왕족과 귀족 중에 흠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고 지식을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 만한 소년을 데려다가 3년 동안 갈대아 학문을 배우고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으며 자라게 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에게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왕의 진미 중에는 우상에 절한 음식이나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생물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이런 것을 먹으면 하나님 앞에 범죄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신 14장). 다니엘은 포로의 신분이지만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고자 감독자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즉 10일 동안 왕의 진미와 포도주 대신 채식과 물만 먹고 마시게 한 다음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과 비교해 볼 것을 담대히 요청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니엘이 사람의 지식과 이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좇았더니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왕의 진미를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얼굴이 더욱 빛나고 건강하게 역사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크게 은총을 더하셨습니다. 그래서 다니엘 1:17을 보면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의 지혜와 총명이 뛰어난 것을 인정하여 그를 바벨론의 모든 도를 다스리는 자리에 올렸습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대를 이은 벨사살 왕과 그 다음 왕인 다리오 왕에게까지 총애를 받았습니다. 다리오 왕은 다니엘의 마음이 민첩함을 인정하여 바벨론의 세 총리 중 수석 총리로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했지요. 총리들과 방백들은 이를 시기하여 국사에 대해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찾고자 했지만 아무 틈, 아무 허물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단 6:4).
   이에 다니엘을 시기한 총리와 방백과 관원들은 왕을 위하는 것처럼 계략을 꾸며 왕에게 유리한 한 가지 금령을 정할 것을 요구하였지요. 바로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니엘이 하루에 세 차례씩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어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것을 통해 고소할 틈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왕은 이러한 궤계를 알지 못하기에 그들의 제안을 흡족히 여기고 조서에 어인을 찍어 금령을 반포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금령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향해 열린 창에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다니엘을 시기한 무리들은 이러한 사실을 왕에게 고했고 그제서야 왕은 금령이 다니엘을 죽이기 위한 모략임을 깨닫게 되었지요.
   하지만 이미 금령이 반포되었으니 왕의 입장에서도 번복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왕은 심히 근심하여 다니엘을 구하고자 마음을 쓰며 힘을 다했지만 계략을 꾸민 무리들이 왕에게 나와 법대로 행할 것을 재촉함으로 결국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2. 죽음 앞에서도 남을 탓하지 않은 다니엘의 선
   
   이처럼 억울한 죽음을 앞둔 다니엘은 자신이 왕의 신임을 크게 받고 있으니 당당하게 항변할 수도 있었지만 결코 사람의 방법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한번 믿은 하나님을 변함없이 전폭적으로 의지하며 죽음 앞에서도 초연하게 정도를 걸었습니다.
   왕의 신임을 잃을까 하여 비굴하게 행동하지도 않았고 생명과 명예와 권세를 잃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 조금도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니엘은 무고한 자신을 사자굴에 던져 넣은 왕에게 조금도 서운한 감정을 갖지 않았고 자기를 모함한 무리들을 향해서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에만 맡기는 선한 모습을 볼 수 있지요.
   평소에 다니엘을 총애하던 왕은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져넣은 후 밤이 다하도록 금식하며 기악을 그치고 침수를 폐한 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이튿날 새벽이 되자 급히 사자굴로 달려가서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하며 슬피 소리쳐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놀랍게도 사자굴 속에서 다니엘의 생생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입니다. 다니엘 6:21-22을 보면 "다니엘이 왕에게 고하되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긴장된 순간에도 왕을 대하여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는 축복의 기원으로 경의를 표하였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한다면 무고한 자신을 사자굴에 던져 넣은 왕을 탓하거나 따지는 것이 옳은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지만 마음에 악이 없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악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설령 윗사람의 실수로 커다란 해를 당할 뻔 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해도 윗사람을 민망하게 하는 말은 결코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윗사람의 입장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을 이해하며 윗사람이 조금도 민망하지 않게 배려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윗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무안하여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일 터인데 아랫사람이 대놓고 자기의 무죄함을 강하게 말함으로 윗사람의 실수를 드러내는 것은 악한 마음인 것입니다.
   
   3. 다니엘과 같이 무죄한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
   
   그러면 누구나 다니엘과 같은 믿음을 갖고 전폭적으로 하나님만을 의뢰하기 원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가 없다면 아무리 극한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염려, 불안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내가 혹 시험을 만난다 해도 피할 길을 열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지요. 더 나아가 설령 내게 불이익이 온다 해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고 축복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온전히 믿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역시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 것은 자신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죄 없는 사람에게 억울함을 당치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임금에 대한 충성과 선함과 정직함을 증거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지요.
   다리오 왕은 심히 기뻐하며 다니엘을 끌어 올리라 명하고 대신 다니엘을 참소한 무리들은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굴에 던져 넣도록 명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굴 밑에 닿기도 전에 사자가 그들을 움켜서 뼈까지 부숴뜨렸습니다(단 6:24). 이를 목도한 다리오 왕은 온 땅에 있는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사람들에게 조서를 내려 다니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알리며 그 앞에 떨며 두려워하도록 함으로써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였습니다(단 6:26-27).
   여기서 우리는 죄가 있는 사람은 결국 깨어지고 망하게 되지만 죄가 없는 사람은 다니엘처럼 죽음이라도 피해 갈 뿐만 아니라 상함을 당치 않도록 각종 어려움과 장애가 물러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을 사자의 밥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독사에 물렸지만 조금도 상함이 없었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에 던짐을 받았어도 불이 그들을 그을리지 못하였지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 속에 들어가면 시험 환난이나 질병이 틈타지 않으며 설령 틈탔다 할지라도 마음을 겸비케 하여 통회자복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 가운데 들어가면 어떠한 문제나 질병도 해결해 주시고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
   
   4.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상대와 부딪칠 만한 일을 피해 버림으로 상대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소극적인 의미만은 아닙니다. 다니엘이 이러한 소극적인 선에 머물러 있었다면 어찌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다니엘이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했다면 30일 동안만 기도를 쉴 수도 있었을 것이고 기도를 하더라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창문을 닫고 부르짖어 기도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자신의 생명과 명예와 부와 권세를 잃는다 해도 결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확고한 신앙을 소유했지요. 즉 조용히 피해 갈 수 있는 일도 적극적으로 진리를 지켜 행했고 차라리 부딪칠지언정 하나님의 뜻이면 생명조차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조금도 원망 불평하거나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부딪쳐오는 환경에 감사하며 모든 사람을 선대해 나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양면성을 다 갖추었을 때 진정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은 이렇게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되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해 나가며 진리라면 굽히지 않고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선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는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해야 할까요? 갈라디아서 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말씀하셨으니 진리에 위배되는 감정을 모두 제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마음 속에 그러한 비진리의 감정이나 악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다니엘과 같이 비진리의 감정을 모두 벗어 버리고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입으며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