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24과 범죄치 마옵소서

읽을말씀 : 삼상 19:1-6
외울말씀 : 삼상 19:4

이 세상에서는 사랑이 여러 가지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지요. 어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한다고 온갖 응석을 받아 주다가 버릇없는 아이로 만들기도 하는데 본문에는 참된 영적인 사랑의 한 분야가 나와 있습니다. 가족이나 섬기는 임금 등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영적인 사랑을 제시하고 있지요. 만일 임금이 잘못된 길로 갈 때 진정 임금과 백성을 사랑하는 신하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옳은 길로 가도록 진언할 것입니다. 또한 부모를 진정 사랑하는 자녀라면 부모가 사망의 길로 가는 것을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선한 사랑을 소유한 요나단의 모습을 통해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영적인 사랑으로 범죄를 막은 요나단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장남으로 사울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할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운 용사였으며 사무엘상 20:2에 "내 부친이 대소사를 내게 알게 아니하고는 행함이 없나니 내 부친이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고백한 대로 왕과 백성들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요나단에게 참으로 고통스러운 문제가 생겼는데 곧 아버지인 사울 왕이 자신이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장면이 바로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 왕과 이를 막으려는 요나단의 모습이지요. 사무엘상 19:1-3을 보면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기뻐하므로 그가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내가 나가서 너 있는 들에서 내 부친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부친과 말하다가 무엇을 보거든 네게 알게 하리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울 왕이 왜 다윗을 미워하고 죽이려 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죽이고 어려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습니다. 다윗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지배하에 들어가 고통받을 뿐 아니라 왕인 사울은 생명조차 보장받기 어려운 형편이었지요.
   또한 다윗은 그 후로도 가는 곳마다 공을 세웠으며, 이미 교만과 불순종으로 하나님께 외면을 당했던 사울 왕이 악신으로 고통을 받을 때도 다윗이 그 앞에서 수금을 타면 악신이 물러가고 평안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생명의 은인이자 훌륭한 신하인 다윗을 죽이고자 한 것은 바로 다윗을 시기하는 악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지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돌아온 왕과 군대를 맞아 환영하는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며 다윗에게 공을 크게 돌리자 이때부터 다윗을 미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무리한 전쟁에 내보내기도 하고 집에 군사를 보내 죽이라 명하기도 하며 다윗을 잡으러 친히 군사를 이끌고 쫓아다니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울 왕이 악이 발동된 상황에서 다윗을 죽이라고 요나단과 신하들에게 명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요나단이 어떻게 사울 왕의 악에 동조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사울 왕이 범죄하지 않도록 다윗을 변호하며 간청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9:4 이하를 보면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말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요나단의 입장이라면 사울 왕과 다윗 중에 누구 편을 드시겠습니까? 물론 시시비비를 가리자면 다윗의 편을 들어야 하겠지만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면 사울 왕은 요나단의 아버지요, 한 나라의 왕입니다. 더구나 다윗이 왕이 된다면 요나단은 자신이 왕위를 얻을 수 없게 되니 다윗이 죽는 것이 유익이 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확히 분별할 수 있었고 아무리 아버지라고 할지라도 범죄하여 멸망으로 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이에 요나단의 말을 들은 사울 왕은 잘못을 잠시 뉘우치며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는 맹세까지 하게 되지요. 그러나 사울 왕은 마음 자체가 악했기 때문에 이렇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고도 마음이 변개하여 계속 다윗을 죽이려 했고, 그때마다 요나단은 사울 왕에게 범죄하지 않도록 간청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울 왕이 노를 발하여 아들 요나단까지 죽이려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2. 끝까지 선을 행하면서 사람의 도리를 다한 요나단
   
   사무엘상 20장을 보면 요나단이 사울 왕의 뜻을 알기 위해 '다윗이 베들레헴에 가도록 자신이 허락하였다'고 하며 부친의 반응을 살피는 장면이 나옵니다. 만약 사울 왕이 다윗을 감시하려 하거나 악한 마음을 품고 있지 않다면 그 일에 별로 마음에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사울 왕은 아들인 요나단에게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 하며 심히 노를 발하였습니다.
   이에 요나단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하며 더욱 다윗을 변호하며 사울 왕의 옳지 않은 마음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러자 사울 왕은 더욱 화가 나서 단창을 들어 자기 아들인 요나단을 치려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끼고 신뢰하는 요나단이 다윗 편을 드니 그만 분에 못 이겨 아들까지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어떤 일을 당해도 마음에 두지 않고 끝까지 다윗을 지켜 주면서 아버지가 돌이키도록 권면해 나갔습니다. 요나단의 선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단지 아버지의 범죄를 막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다하며 더욱 깊은 차원의 선(善)으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선한 사람이라면 누가 악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차라리 눈을 돌려 버리고 싶고 악한 사람 곁에 머물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선한 사람은 더욱 큰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나단 역시 악한 아버지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자녀로서의 도리를 한 번도 어겨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서는 분명히 옳고 그름을 가렸지만 이 역시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선한 행동이었지요.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이미 사울 왕을 버리신 것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악인과 함께하는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까지 예상할 수 있었지만 결코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과 함께 싸우다가 당당히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이나 역사를 통해 한 사람이 바로 서지 못하고 죄를 짓게 되면 그 가족 전체가 고통을 받아야 하고 이웃까지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몇몇 사람의 범죄로 백성 전체가 고통받는 경우도 많으며, 더구나 범죄한 사람이 머리되는 위치에 있다면 더욱 피해가 심각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치 아니하며 더 나아가 범죄하는 사람들을 선한 마음으로 빛 가운데로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3. 진정한 선(善)은 범죄를 막고 진리로 이끄는 것
   
   믿음 안에서 온 가족을 진리로 이끌기 위해 힘쓰며 앞서 본을 보인 성도의 경우를 잠시 소개하지요. 이분은 가족 중에 누구라도 입술에 부정적인 말을 한다든가, 하나님을 서운케 하는 말을 하면 권면하여 진리의 말만 하도록 도왔습니다.
   물론 가족의 믿음이 좋았기에 일부러 죄를 짓는다거나 크게 범죄하는 일은 없었지만 생활 속에서 조그마한 죄라도 짓지 않도록 막아 주니 가족 전체가 더욱 진리로 변화되어 교회에서도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선이며,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그리고 온전한 선은 어떤 것인지 잘 알았고 그러한 선 속에서 가족들을 사랑했기에 가족들에게 늘 선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했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행하도록 인도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된 길을 가는데도 마음 상할까봐 혹은 화평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혹은 육적인 정에 가리워 그냥 바라보고만 있는데, 이는 마치 엘리 제사장과 같이 육적인 사랑을 주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삼상 2-4장). 엘리 제사장은 자신의 두 아들이 크게 범죄했을 때 말로만 권면할 뿐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가 그 집안에 큰 재앙이 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에든지 죄라면 그냥 덮어두려 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하도록 막아 주고 권면해 줄 수 있는 영적인 사랑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요나단을 통해 다른 사람이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 선이요, 또한 그로 인해 생기는 피해를 막는 것이 선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로 인해 생명을 잃는다해도 끝까지 선을 행해 나가는 것이 온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나단은 그 마음이 선하고 영적인 사랑으로 충만했기에 자신의 아버지가 범죄했을지라도 끝까지 그 아비를 배신하지 않고 함께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될 것이고 그의 아들 므비보셋도 다윗 왕이 거두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왕자 중의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도록 배려해 주었으며 그의 할아버지인 사울 왕의 재산을 그대로 가지게 해 주었지요.
   이처럼 선의 결과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요나단과 같이 범죄를 막으려 하고 공평한 추가 되어 정도를 좇으며 영적인 사랑으로 끝까지 선을 행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