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 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는 말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입술의 고백으로 상대에게 감동을 주기 보다는 불필요한 말이나 악하고 미련한 말을 냄으로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자녀들은 악한 말을 내지 않음은 물론, 스스로 선한 말을 하는 단계를 넘어 설령 상대가 내 마음을 심히 아프게 하는 말을 하더라도 도리어 선한 감동의 말로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상대에게 은혜를 끼치며 오히려 상대가 선한 사람이 되도록 이끄는 선의 단계를 이루어야 하지요.
오늘은 수로보니게 여인을 통해 감동적이고 선한 입술의 열매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을 감동시킨 수로보니게 여인의 고백
예수님께서는 주로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하셨는데 북쪽에 있는 두로와 시돈 곧 이방인이 사는 수로보니게 지역에 머무신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없었던 권세 있는 말씀이 선포되고 소경이 눈을 뜨며 각색 질병으로 고통당하거나 귀신 들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으며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소문에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지요.
가나안 민족의 자손인 수로보니게 족속으로 귀신 들린 딸로 인해 마음에 큰 고통을 안고 있던 가나안 여인 곧 수로보니게 여인도 이런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와 무엇을 간구한다는 것은 참으로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여인이 모르는 남자 앞에 함부로 설 수 있는 때도 아니었고 더구나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멸시하고 천대하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로보니게 여인은 귀신 들린 딸을 구할 수 있겠다는 기쁨과 떨림으로 예수님께 달려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하고 외쳤습니다. 이방인을 멀리하지 않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상하게도 귀신 들린 딸을 구하기 위해 자존심이나 두려움을 접어 두고 간청하는 이 여인을 모르는 척하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 본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하고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고 뜻밖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완전히 무시를 당한 것과 같은 상황에서도 이 여인은 실망하지 아니하고 더욱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발아래 엎드려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 하고 간청하였지요.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실 은혜를 이방인들에게 베푸는 것은 마치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던져 먹게 하는 것과 같다는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말의 자존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개에 비유하니 참으로 어이가 없어 돌아가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처럼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먼저 "주여 옳소이다마는" 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긍정한 후,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면서 다시 간청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끝까지 겸비한 태도로 믿음의 고백을 하는 이 여인의 선함은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드디어 응답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말씀하시니 그 즉시 딸에게서 귀신이 떠나갔지요.
어떤 사람은 마음 중심에서 이 여인처럼 겸비한 마음이 아닌데도 순간에 간교한 지혜를 짜내어 "아, 이럴 때에는 내가 이러이러한 겸손한 대답을 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사야 되겠다" 하며 비슷한 대답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진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거듭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실 때에는 결국 본색이 드러나고 변개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지요.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미 선한 중심으로 마음에 겸비함이 임해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답변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다면 상대로부터 어떤 말을 들었다 해도 감정이 나지 않고 다투지 않을 것이며, 더군다나 자신이 먼저 말로써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이 겸비한 마음으로 지혜를 동원하면 오히려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아내에게 기분 상할 말을 했다 하더라도 아내 편에서 오히려 남편의 마음에 감동을 준다면 "내가 참으로 잘못했구나" 하는 깨달음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선의 마음입니다. 상대가 내 마음을 비수와 같이 찌르는 말을 한다 할지라도 상대를 먼저 이해하고 품어 줄 수 있는 마음이 된다면 그야말로 행복이 가득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2. 감동적인 고백을 한 성경상의 인물들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주의 첩경을 평탄케 했던 세례 요한은 주님에 대해 전파하기를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막 1:7)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로서 너무나 거룩하고 선하며 의로우실 뿐 아니라 무한한 권능으로 천하 만물을 호령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자체가 너무나 황송하게 여겨졌기에 그분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그를 떠나 예수님을 따른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고백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때와 기한을 바로 알고 있었으며 그것이 다 찼을 때 겸손히 물러나는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세례 요한의 고백들은 한마디 한마디가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낮아진 그의 중심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칭찬하신 것이지요.
사도 바울 역시 자기를 완전히 벗어 버린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8-9)라고 말한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 그가 얼마나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만을 좇기 원했는가를 잘 알 수 있지요. 이처럼 사도 바울은 한 번 만난 주님 앞에서 자신이 쌓아 왔던 것들을 철저히 무너뜨리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생명 다해 주님을 증거하고 다녔습니다.
또한 이전에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지만 주님을 만나 변화된 사실을 늘 간증하면서 자신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 하였고(고전 15:8)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고백하며 스스로 낮추었지요.
더구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찌나 컸던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독사에게 물리고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으니 그것을 본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신처럼 극진히 접대하는 일도 있었지요.
3. 겸비함으로 지적받는 선한 마음과 그에 따른 축복
우리 성도님들 중에도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여 열심히 전도하고 기도에 힘쓰며 철야기도와 금식 등으로 늘 충성 봉사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아직 온전한 믿음 안에 들어오지 못한 상태라면 저는 그분들을 칭찬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충성과 더불어 더욱 중요한 것은 마음의 할례라는 점을 깨우쳐 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한 마디라도 칭찬하고 격려해 주면 더욱 충만해지고 열심을 낼 수도 있겠지만 더 진리의 사람으로 이끌기 위해 칭찬보다 오히려 지적을 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 지적을 받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다음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감사함으로 받지 못하고 서운한 감정이 생김으로 인해 도리어 기쁨을 잃고 충만함을 잃어버리는 경우입니다. 물론 제 입장에서는 그분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당장은 감사함으로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깨닫고 더 큰 능력을 얻을 것이기에 말씀해 드리는 것이지요.
두 번째 유형은 지적한 사항에 대해 변명하고자 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변명하는 사람들은 발전이 없고 항상 제자리걸음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지적해 드릴 때는 상대의 발전을 기대하고 하는 것인데 여기에 변명이 따른다면 받을 그릇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니 더 이상 대화를 계속하기가 어렵지요.
세 번째 유형은 지적받은 말씀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어떻게든 본인을 더 온전케 이끌기 위해 마음 써 주시는 목자의 마음을 전달받아 잘한 것은 뒤로 한 채 무조건 감사함으로 받는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무슨 말이든 해 줄 수 있고 본인들은 받은 즉시 개선해 나갈 터이니 신속히 진리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적을 받을 때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 지적을 통해 변화될 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지적받기를 사모하고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진리를 사모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단계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 헛된 자존심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머리 숙이며, 한 마디의 말을 하더라도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는 선의 마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