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49과 네 의와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읽을말씀 : 시 37:4-6
외울말씀 : 시 37:4-6

시편 37:4을 보면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기뻐하는 신앙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빛 자체가 되시는 하나님을 닮아 마음속에 있는 어두움을 모두 벗어 버리고 밝은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빛과 어두움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이 아직 벗어 버리지 못한 어두움은 과연 무엇인지를 발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호와를 기뻐하는 신앙에 대해 몇 가지 분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행악자로 인해 불평하지 말며 불의한 자로 인해 투기하지 말아야
   
   시편 37:1을 보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어두움을 두 가지로 소개하고 있는데, 한 가지는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는 것이요, 또 한 가지는 불의를 행하는 사람을 투기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행악자들의 불의를 목격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잘되는 것 같아 보이면 불평하거나 내심 투기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의혹을 품는 것과 같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이르지 못하는 어두움에 속한 일입니다.
   물론 여호와를 기뻐하기 위한 더욱 적극적인 신앙 자세는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않는 차원을 넘어서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며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는 것입니다(시편 37:3).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성실한 보상이 주어지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앞길을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여 선을 행하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성실한 은혜에 자족함으로 진정 여호와를 기뻐하는 삶을 영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사람을 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편 37:2에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말씀한 대로 악인이 잘되는 것은 풀이 곧 베임을 당하고 푸른 채소가 쇠잔하여짐과 같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24:19-20에도 보면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말씀했지요. 악인의 종국이 멀지 않지만 의인의 영광은 영원하리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악자로 인해 불평하거나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할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하겠습니다.
   
   2. 여호와를 기뻐하는 방법
   
   히브리서 11:6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우리가 이성적으로 믿을 수 있을 때만 "믿습니다" 고백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믿음, 생명도 드릴 수 있는 믿음,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8장을 보면 이러한 참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백부장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선한 중심을 보시고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하였습니다. 당시 지배국가의 권세 있는 백부장이 육적으로 볼 때는 피지배국의 한 사람에 불과한 예수님께 나아와 이와 같은 고백을 했다는 것은 그 마음이 참으로 선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또한 백부장은 이어 말하기를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대답을 기이히 여기시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고 백부장을 크게 칭찬하시며 하인의 병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백부장과 같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칭찬받는 사람이 되면 응답받지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더불어 오늘 말씀을 통해 특별히 강조되고 있는 분야는 시편 37:7에 기록되어 있듯이 자기 길이 형통한 사람으로 인해 불평하지 않으며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자기 길이 형통한 사람이란, 자신의 방식에 따라 번영하는 사람으로, 앞서 시편 37:1을 통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거듭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14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말씀하신 것처럼 여호와 앞에 잠잠히 참아 기다리는 것은 바로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시고 앞서 행하실 수 있도록 맡겨드리는 믿음의 행함이기에 가장 적극적이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 기쁘시게 하려면 범사에 하나님을 의뢰하며 잠잠히 참아 기다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3. 여호와를 기뻐하는 사람이 얻는 결과
   
   앞서 여호와를 기뻐하는 마음가짐은 행악자들이 누리는 일시적인 형통함을 불평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악인이 잘 되는 것을 투기하지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성숙한 단계는 자기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는 신앙입니다(시편 37:5). 바로 이러한 신앙이 되면 그 의가 빛같이 나타나며 그 공의가 정오의 빛같이 드러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기의 길을 여호와께 맡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흔히 사람들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는 말씀을 알면서도 막상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당장 눈앞의 현실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행치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여호와께 맡기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의지하는 신앙이 되면 하나님께서 이를 기뻐하셔서 마음의 소원에 응답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모든 일에 간섭하셔서 그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하고 계십니다.
   본문에서 의가 빛으로 비유된다면 공의는 태양이 가장 작열하는 정오의 빛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란 나 보기에 의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맞대응하여 이겨야 할 경우도 있겠으나 때로 피해야 할 때는 피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숨어야 할 때는 숨으시고 피해야 할 때는 피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요.
   따라서 우리가 의를 행하되 하나님께서 옳다 인정하시는 의를 행해야 하며, 바로 이러한 의가 있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빛으로 드러나게 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나름대로 의를 추구하며 산다 하면서도 자신의 악을 발견하지 못하여 자기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자기에게 해를 가하거나 악을 행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마음이 금방 불편해지고 분하여 견디지 못합니다. 또한 자신이 속한 조직의 화평이 깨어지고 상대가 고통을 받게 되더라도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들이 자기 보기에 아무리 의로워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감정과 악을 이기지 못하는 어두움임을 본문을 통해 깨우쳐 주고 계십니다. 시시비비를 가려서 자신의 정당함을 인정받은들 그것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선악간에 다 보고 계시니 하나님께 맡기고 잠잠히 참아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더 명심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의 티와 허물이 보이는 만큼 상대적으로 자신의 마음속에도 불의가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악이 많은 사람일수록 상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3-5을 보면 형제의 티가 보이는 사람의 눈 속에는 그 티보다 훨씬 큰 들보가 있다는 말씀의 비유로 자신은 의로운 양 남을 비판하고 헤아리는 것은 외식이요, 더 큰 악임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4. 여호와를 기대하는 사람의 기업
   
   시편 37:9-11을 보면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기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만이 진정한 축복인 줄을 알고 그분만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렇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땅에 거하는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 세상이 운행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생사화복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 맡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름 낀 하늘 아래서도 햇빛을 기대하듯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의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여호와를 기대하는 정도가 달라서 하나님의 보호하심 또한 사람마다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 동일하시지만 사람들 편에서 얼마큼 여호와를 기대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응답하심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밀한 분야까지 하나님의 간섭을 받아 더 온전하게 변화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는다 하면서도 전혀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기대하고 모든 문제를 맡김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려야 하겠습니다.
   
   5. 여호와를 기뻐하는 신앙의 넓이와 길이, 높이와 깊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믿음의 선진들을 살펴보면서 과연 그들의 중심과 마음씀이 얼마나 아름답고 헌신적이었는지 우리 자신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룻이라는 여인을 상고해 볼 때 많은 사람들은 성경상에 소개된 룻의 단면적인 모습을 통해 자신을 비교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룻과 흡사한 점들이 있음을 생각하며 자신의 어두움을 발견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룻과 비교해 보며 "나도 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에 대한 섬김과 예우가 각별하며, 여러 모로 선하며 지혜롭고 현숙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하나님께서 룻을 높이시고 기뻐하셨던 데에는 룻의 단면적인 착함이나 의로움, 진실함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좋은 심성을 룻이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어떤 환경에서도 변치 않는 시어머니에 대한 헌신이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되었지만 굳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말씀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룻의 행함이나 마음 됨됨이와 인물 됨됨이를 빛되신 하나님께서는 다 감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을 살펴보며 그들의 표면적인 장점만 볼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인물됨에 관해 그 넓이와 길이,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가를 깨닫고 종합하여 분별할 줄 알아 우리 자신을 온전케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며 정도를 좇아 행하되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므로 잠잠히 참아 기다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향한 의로움이 큰 빛을 발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러서도 넓은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