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4과 선 (4) - 요나단 -

읽을말씀 : 삼상 19:4-5
외울말씀 : 삼상 19:4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의 맏아들인 요나단은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었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폐하시고 왕으로 세우겠다고 약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볼 때 다윗과 요나단은 적수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다윗을 원수처럼 여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으며 친구를 사랑함이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다고 합니다(삼상 18:1, 삼하 1:26).
   이것은 다윗의 선함을 알아볼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요나단에게도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나단의 아름다운 선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1. 사울 왕의 범죄를 묵인하지 않았던 요나단
   
   다윗은 원래 양치는 목동이었으나 이방 족속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믿음으로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물리침으로 이스라엘에서 유명한 자가 되었습니다. 사울 왕은 나라를 구한 다윗을 처음에는 매우 기뻐하여 군대의 장으로 삼았지만 이들을 환영하러 나온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고 노래하자 다윗을 미워하기 시작했지요.
   날이 갈수록 사울 왕의 시기심은 심해져 다윗을 죽이려고 무리하게 전쟁에 내보내기도 하고 그의 집까지 군사를 보내 죽이려고도 했습니다. 이처럼 다윗을 애매히 죽이려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왕의 범죄를 묵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19:4-5을 보면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라고 간청하였는데 얼마나 아름다운 선(善)인지요.
   
   2.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 요나단
   
   1)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 선
   만약 여러분이 요나단과 같은 입장이라면 사울 왕과 다윗 중에 누구 편을 드시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사울 왕은 요나단의 아버지요, 한 나라의 왕이니 사울 왕의 말을 거역하고 친구 다윗을 옹호하는 것은 육적으로는 불효이자 불충이 됩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이 이미 하나님의 싫어하신 바가 되었고 다윗이 다음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습니다. 요나단은 차기 왕이 될 수 있는 입장이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사심 없이 받아들여 다윗을 도왔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보았는데 어떠한 마음이었을까요? 요한복음 3:30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고백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자신의 명예와 영광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의 선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이룰 때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성취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잘 되기를 원한다.'고 하지만, 막상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주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비슷한 일을 이뤄 가는 두 부서가 있다고 할 때, A라는 부서가 어떠한 일을 오랫동안 많은 공을 들여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만들어진 B라는 부서가 어떤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A부서가 그동안 해 놓은 것을 잘 이용하면 짧은 시간 안에 눈에 보이는 많은 일들이 이뤄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합시다. 이때 B부서가 어떤 자료나 인력, 기술 등의 협조를 A부서에 요청한다면 얼마나 기쁨으로 내어줄 수 있을까요?
   요나단이나 세례 요한의 마음과 같이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설 수만 있다면, 자신의 영예나 칭찬을 얻지 못한다 해도 소금처럼 아무 형체도 없이 녹아질 수 있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이라는 사실입니다.
   
   2) 범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선
   요나단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는 큰 악을 막기 위해 살기등등한 아버지께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간청했습니다. 비록 사울이 악할지라도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어찌하든 더 큰 악을 행치 않도록 자신이 해를 받을지라도 거듭 간청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충신들은 왕을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왕이 그릇 행할 때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라도 왕 앞에 나아가 바른 말 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여러분들도 사망의 길로 가는 부모님이나 형제, 자매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셨는지요? 교회 안에서 여러분이 소속된 부서나 조직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윗사람이 불법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어떻게 하십니까?
   정녕 윗분을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먼저는 허물을 드러내지 않을 것입니다(잠 17:9). 그런데 명백한 비진리를 행한 것도 아닌데, 내 의나 내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하며 윗분을 내 임의로 판단하여 윗분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고 퍼트린다면 이는 마음이 얼마나 선치 못하고 사랑이 없은 행위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설령 윗분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길로 갈지라도 윗분의 허물을 거듭 말하는 것은 원수 마귀 사단으로 하여금 더욱 훼방할 거리를 안겨 줄 뿐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말할 건이 아니다." 하고 물러서서 방관하는 것도 선이 아닙니다. 또한 윗분이니까 말하기 어려워서, 또는 내가 그 말을 꺼냄으로 인해 내게 돌아올 수도 있는 불이익이 두려워서 그냥 묵인하고 있다면 이 또한 윗분에 대한 도리를 다한 것도 아니며, 하나님 보시기에 선도 아니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선일까요?
   먼저는 진리를 아뢸 수 있는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다만 상대가 질서상 머리된 분이니 아랫사람으로서 선과 사랑과 섬김의 마음으로 권면한다면 윗분도 마음 상하지 않으면서 그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아랫 사람을 사랑하고 섬길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의 경우, 성도님들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어떻게든 성도님들이 죄를 짓지 않고 진리 가운데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정성을 다해 가르치고 말씀을 확증하는 증거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나서 '내 할 바를 다 했다.' 하지 않고, 한 영혼 한 영혼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기를 쉬지 않지요.
   또한 실질적인 사랑의 행함이 필요한 경우에는 그에 맞는 섬김으로 성도들이 범죄치 않고 더 충만하게 달려 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구제를 통해 막아질 일이라면 구제를 해서 범죄를 막기도 하는데, 믿음이 연약한 성도는 필요한 데만 다 쓰고 십일조를 하지 못함으로 하나님 앞에 또 죄를 범할까 염려되기 때문에 아예 십일조까지 드릴 수 있도록 넉넉하게 구제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최선을 다해 성도들이 진리 가운데 살아가도록 도와주어도 또 죄를 짓는 성도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어떻게 하면 사랑과 긍휼을 베풀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다시금 마음에 품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 공의를 뛰어넘는 사랑으로 용서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며 기도하면 기가 빠질지라도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다면 기꺼이 해산하는 수고를 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하거나 옳지 못한 길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선이기 때문이지요.
   
   3) 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끝까지 다하는 선
   선한 사람들은 누가 악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차라리 눈을 돌려버리고 싶고 악한 사람 곁에 머물기를 원치 않습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선한 사람은 더욱 큰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요나단은 악한 아버지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자녀로서의 도리를 결코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아버지 사울 왕을 버리신 것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악인과 함께하는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까지 예상할 수 있었지만 요나단은 결코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아버지 사울 왕과 함께 싸우다가 당당히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생사를 함께함으로 도리를 다했던 것을 바로 선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버린 사람이라도 도리를 좇아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선이라고 잘못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의 악함을 알았고 아버지가 범죄치 않도록 수차례 간청을 했습니다. 즉 요나단이 자녀된 입장에서 멸망 길로 가는 아버지를 자신마저 차마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 결코 아버지 사울을 동조하거나 사울의 악함을 몰라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좇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치 않도록 온 힘을 다한 요나단의 선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범죄치 아니하며 더욱 신속히 온전한 선에 이르심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과 축복의 대열에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