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9과 선 (9) - 사도 바울 (1) -

읽을말씀 : 고전 15:9-10
외울말씀 : 고전 15:10

사도 바울은 다소 출신으로 베냐민 지파에 속하며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엄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로서 한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여 옥에 가두며 죽이기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회심한 후에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많은 교회를 세워 세계 선교의 기반을 마련한 이방인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지요.
   사도 바울은 원수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어 가는 곳마다 권능의 역사를 크게 베풀고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선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1.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택정함을 입은 사도 바울
   
   원래 사도 바울은 의가 아주 강한 사람으로 자신이 가진 지식과 의로써 다른 사람들을 누르기를 좋아하고 어떤 것에 대해 변론하기를 즐겨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사도행전 22:3에 기록된대로 당대 최고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라는 것이 도무지 자기적인 의에 맞지 않았고 그냥 묵인하고 지나칠 수 없었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때가 이르자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기 의가 강할 뿐 아니라 한번 옳은 것을 깨우치면 변개치 않는 중심을 지닌 바울에게 은혜의 체험을 허락하셨지요. 바울이 다메섹이라는 다른 도시에까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원정 가던 중에 주님께서 만나 주신 것입니다.
   바울의 예전 이름은 사울이었는데 주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말씀하시며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바울은 사흘동안 눈으로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를 통하여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되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게 하기 위해 선택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다메섹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행 9:22).
   
   2.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은 바울의 선(善)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비밀과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되자 마치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 자신의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귀한 사명을 주셨으니 주님의 은혜에 깊은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았습니다. 모진 핍박과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더욱 깊고 진한 감사의 고백이 나왔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고난에 대해서는 고린도후서 11:23-27에 잘 나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 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 벗었노라"
   이처럼 사도 바울은 죽도록 충성하며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마음 중심에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가 끊임없이 더욱 진하게 흘러나왔습니다. 아무리 곤란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결코 서러워하거나 낙심하지 않았고 깊은 감옥이나 파선의 위험 속에 있다 할지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앞을 향해 갈 수 있는 채찍질로 여기고 많은 상급을 쌓게 하시며 주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마음 중심에서 기뻐하고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나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처음 믿은 때부터 지금까지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고백하지만 과연 바울의 고백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산다 하지만 과연 바울과 같은 고난이 허락되어질 때 바울처럼 중심에서 감사할 수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바울의 고난에 비하면 고난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작은 어려움에도 이내 절망하고 낙심하지 않았는지요? 하나님의 나라에 충성하고 모든 것을 다 드리기까지 헌신했는데 원하는 대로 축복이 임하지 않을 때 혹여 마음이 슬퍼지지는 않았는지요? 또는 자기 스스로 실망하여 '나는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는 육신의 생각으로 많은 분야에서 포기해 버리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이러한 마음이 들었던 분에게 바울과 같은 고난이 임한다면 과연 감사의 고백이 나올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로 한 번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난 이후로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고 종국에는 순교의 자리에 이를 때에도 오직 감사의 고백을 올릴 수 있었지요. '
   이제 내 생애가 이렇게 마감하는구나' 하고 착잡한 마음이나 회한의 마음이 든 것도 아니요,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한 경직된 심정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앞두고 너무도 보고 싶었던 주님을 이제 곧 직접 뵈올 수 있다는 기쁨으로 인해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 앞에서 긴장하기 마련이지만 사도 바울은 소망으로 가득하여 오히려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처럼 어떠한 고난을 받을 때에도 심지어는 생명을 잃는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참으로 곱고 선했기 때문입니다.
   
   3. 범사에 감사한다는 의미
   
   그러면 여러분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이루셨는지요?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감사하고 기쁜 일은 물론이요, 어려움이 와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할 조건이 있을 때에 감사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현실에 어려움이 있다 해도 믿음으로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간구하면 어떤 문제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므로 감사할 수 있는 것이요, 또한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고 고난을 받는다 해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므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을 두고 감사해도 다 갚을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받았습니다.
   세세토록 끔찍한 지옥 불에서 고통받을 뻔 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죄사함받았고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어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베드로전서 1:7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로마서 8:18에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했지요. 그러니 믿음의 시련을 통해 더욱 온전케 하심에 감사하고 주님을 인하여 잠시 받는 고난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으로 갚아 주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으므로 중심에서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더욱 큰 감사의 조건을 만들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 그를 통해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를 올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바울을 마음껏 연단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울은 정녕 큰 사도로서 무수한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돌리는 복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권능의 손에 붙들린 바 되고 귀한 성령의 도구로 변화되어 크게 쓰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