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 선지자는 아합 왕이 북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이방 여인인 왕비 이세벨이 가져온 바알신이 널리 퍼져 우상 숭배가 만연했지요.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수년 동안 우로가 내리지 않게 되리라는 말씀을 아합 왕에게 전달하는 것이 엘리야 선지자의 첫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합 왕은 회개하고 돌이키기보다는 가뭄의 저주를 선포한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왕을 피하여 그릿 시냇가로 가서 머물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가뭄으로 시내가 마르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가서 유하게 하셨습니다. 사르밧 과부로부터 떡 한 조각을 공궤 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내려 주기도 하고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리기도 했지요.
많은 날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아합 왕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사백 오십인과 대결하여 불의 응답을 끌어내렸으며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후 엘리야의 기도로 가뭄이 끝나고 큰 비가 왔습니다(약 5:17-18). 이밖에도 엘리야는 요단강을 가르기도 하고 앞일에 대해 밝히 예언하는 등 큰 권능으로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엘리야는 어떠한 선의 마음을 가졌기에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큰 자'라 인정하시고 놀라운 권능으로 함께하시며 기도에 응답하신 것일까요?
1. 심히도 겸비한 마음을 가졌고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았던 엘리야의 선
엘리야가 심히도 겸비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영으로 변화된 이후의 영적인 표현이고 아직 하나님의 능력이 입혀지기 전의 그는 심히 유약한 성품이었습니다. 항상 자신이 부족하고 내세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자신감을 갖지 못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주장하지 않았으며 혹 다른 사람이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면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고 맞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수그러들었지요. 이처럼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았기에 엘리야가 있는 곳에는 화평이 깨어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육으로는 우유부단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영으로 변화된다면 큰 선지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되는 마음이었지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이러한 마음의 선을 크게 사시고 그를 택하여서 연단을 통해 큰 선지자로 쓰임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육적으로 담대한 사람들이 영으로 변화되면 또한 귀히 쓰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모세, 베드로, 사도 바울은 변화되기 전에 육적으로도 매우 담대하고 똑똑하며 능력 있는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그들도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기까지 반드시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처럼 연단을 통해 마음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본래 성품이 심히도 유약하여 자존심도, 들렘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이러한 면을 좋게 여기시고 선지자로 택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엘리야는 '나는 부족한데 어찌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을까?' 하며 두려움을 갖게 되었지요. 그런데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겸비한 것은 좋으나 한 시대의 큰 선지자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그 유약함이 영으로 변화되어야 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연단이 따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처음 엘리야가 아합에게 가뭄이 들 것을 선포한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먼저 엘리야로 하여금 숨을 곳을 지정해 주셨지요. 그로부터 3년 후 하나님께서는 다시 엘리야에게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아합은 이스라엘의 가뭄이 엘리야 때문이라 생각하여 엘리야를 심히도 미워하고 잡고자 하는 때였지요. 만일 붙잡힌다면 생명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아합에게 보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유약한 엘리야로서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었으나 엘리야는 아합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지요. 더 나아가 바알의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인에게 갈멜산에서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는 대결을 하자고 제안하기까지 했습니다.
엘리야가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항상 하나님과 교통하는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정녕 부족한 사람이기에 하나님과 늘 교통하기를 힘써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깨달으려 했습니다. 또한 자신은 정녕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늘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구할 수밖에 없었고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기 위해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힘썼지요. 이를 통해 엘리야는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담대함과 능력, 그리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체험들을 해 나가면서 "사람의 생각으로 바라볼 때는 되어지지 않는 일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면 능히 된다."는 믿음이 더 확고히 심겨지게 되었습니다. 단번에 그의 유약함이 벗겨진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연단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끈을 놓지 않고 붙잡으니 엘리야는 승리할 수 있었고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함이 입혀졌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하나님의 믿음 안에서 어떤 것도 이룰 수 있다는 목표를 가지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낼 수 있었지요. 바로 엘리야가 큰 권능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도 육의 한계 속에 있는 자신은 할 수 없으되 여호와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으므로 자신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오직 믿음으로 순종한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서 가능한 일들을 육의 공간에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사람을 택하여 쓰시고자 할 때 굳이 육적으로 능력이 많은 사람을 찾을 필요가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그대로 받아 나타낼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을 그릇이라 할 때 그 그릇 안에 이미 "자기"가 많이 담겨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담길 수가 없고 설령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 주신다 해도 이미 그릇 안에 담긴 "자기"와 섞여서 순수한 하나님의 능력은 발휘되지 못하지요.
그러므로 첫째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릇은 "자기"가 온전히 비워지고 깨끗한 그릇입니다. 다음으로 자기가 비워지고 깨끗한 그릇이라 해도 바닥이 깊은 그릇에 많이 담기듯 자신의 마음을 겸비하게 낮추면 낮출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많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야는 이 두 가지 조건이 다 갖춰져 있었지요. 늘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족한 사람임을 중심에서 진실하게 고백했고 항상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육적으로 볼 때는 능력이 없고 약해 보이는 사람을 택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입히시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지요(고전 1:27-29).
그런데 때론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사람들 중에서 "자기"가 온전히 비워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욕심과 들레는 마음 등이 있으면서도 마치 자신이 하나님께 택함 받아 쓰임받는 것처럼 스스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여 받은 은사가 나타나면 이내 교만해져서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경우도 있지요. 마태복음 7:20에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하셨으니 여러분들은 열매로 밝히 분별하셔서 이런 사람들에게 미혹 받는 일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야고보서 1:14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했던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자기 마음 그릇을 비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신속히 벗어 버리고 육의 찌끼와 혼잡물들도 빼내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신령한 하나님의 능력과 풍성한 은혜가 임하게 되지요.
더 나아가 자기 의와 틀도 철저히 깨뜨려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도 자기를 전혀 주장치 않으므로 어느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았다 했지요. 늘 하나님과 교통은 하였으나 성령이 마음에 임하지 않은 구약 시대임에도 자기를 주장하지 않으므로 항상 화평을 이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령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일꾼들 사이에서 자기 의를 버리지 않음으로 인해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마음에서 불편함을 품는 경우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또한 자신은 진리라고 생각하고 만들어 놓은 틀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을 주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그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예수님의 보혈로 사해 주셨으며 은혜로 덮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입은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죄와 의에 대해서 밝히 분별은 하되 하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사랑으로 감싸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죄인들을 섬기셨던 예수님처럼 설령 나 보기에 의롭지 못한 상대도 섬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의 참된 의(義)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이 참된 의라 믿고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마음과 자세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린도후서 4:7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질그릇과 같은 우리를 택하사 보배를 담는 그릇이 되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겸비하게 자신을 낮춤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항상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