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의 선, 첫 번째는 심히 겸비한 마음을 가졌고 자기 의가 없어서 어느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았던 점이요, 두 번째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점이라 했습니다. 엘리야는 이 땅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사랑으로 두려움 없이 강하고 담대하게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 냈고 승천한 이후에도 체일체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이 더욱 승해졌다 했습니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의 사명에 대해 알게 되자 마음에 주를 사모함이 불붙는 듯하여 "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했고 그 고백대로 이 땅에 다시 내려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맡게 되었지요.
엘리야는 이 땅에 다시 내려와 세례 요한으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고 마침내는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이렇게 엘리야 곧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자기 본분을 변함없이 지켰던 것이 엘리야의 선, 세 번째 덕목입니다.
1.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자기 본분을 변함없이 지켰던 엘리야의 선
지난 시간에 산 채로 들림받은 엘리야가 어떻게 다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새 생명이 잉태될 때,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겨 왔는데, 이때 육의 부모의 기에서도 영향을 받게 되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시 가장 선하다 할 수 있는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을 택했다 했지요(눅 1:6).
그런데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아이가 없었고, 두 사람은 이미 나이가 많은 상태였지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천사장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장차 아이를 얻게 될 것을 알려준 말씀이 누가복음 1:13-17에 나옵니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던 것이지요.
그 후에 정말 엘리사벳이 수태하여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얼마나 가브리엘이 일러준 말씀을 명심하여 아이를 잘 양육했겠는지요? 그런데 누가복음 1:80을 보면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빈들에 있었다"는 것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세례 요한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면서 늘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이루었고 세상에 드러날 때를 정확하게 주관받게 됩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줄을 알았을까요? 요한복음 1:21에 유대인들이 "네가 엘리야냐?"라고 물었을 때 "나는 아니라"고 답한 것으로 보아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것을 몰랐습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받았으되 부모의 기로 인해 가리워졌기 때문이지요. 우리 예수님께서는 영 자체가 마음이요 부모의 기를 전혀 받지 않으셨기에 이미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열두 살 때 있었던 한 일을 통해 알 수 있지요. 바로 누가복음 2:49에, 성전에 계신 예수님을 찾은 육의 부모에게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이미 알고 계셨던 예수님과는 달리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요. 하지만 그의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겨 있었기에 어렴풋이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마음의 주관을 받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세상과 구분되어 절제된 삶을 살며 늘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자신의 사명에 대해 깨달아 나가게 되었지요. 즉 '내가 오실 이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과 무엇을 외쳐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하나하나 마음에 주관 받게 되고 세상에 드러날 때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치며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지요(마 3:5-6).
이러한 가운데 누가복음 3:15을 보면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누가복음 3:16에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답했지요. 세례 요한은 자신의 본분, 곧 자신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고 그 이상을 넘어서지 않고 잘 지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신다."고 전파하니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나 장차 오실 분에 대한 사모함이 더해졌겠는지요?
이처럼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잘 예비하고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향하게 되었지요. 이에 대해 요한복음 3:26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고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요한은 '이제 내 시대는 끝났구나!' 하며 서글퍼했던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3:28-30을 보면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했습니다.
제자들을 타이르며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본분을 되새겼고 주님의 나타나심을 진실로 함께 기뻐했지요. 어떠한 사심도, 불의도 찾아 볼 수 없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세례 요한의 주님에 대한 영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에 대한 이 마음은 옥에 갇히고 순교를 당하기까지 변함이 없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킨 점을 참으로 선으로 여기신다는 사실입니다.
2.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본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심히도 가까운 이 마지막 때에 사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신 분임을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해 그 길을 예비했던 것처럼 우리도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재림의 주님을 함께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본교회에 주신 사명을 한 마음으로 이루는 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지요. 세계 선교와 대성전 건축을 이루기까지 모든 과정이 영혼 구원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큰 과업을 이루기 위해 교회내 각 부서와 조직이 있는 것이고 각자가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할 때 결과적으로 교회적인 사명도 이루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각자가 맡은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한 직분이 없다 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전도의 사명이 있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사명이 있지요.
이처럼 어떠한 사명을 맡았다 해도 세례 요한처럼 변함없이 자기 본분을 지키는 자가 되면 주의 길을 잘 예비한 일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본분을 잘 지키지 못하는 이유가 마음이 높아졌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자기 유익을 구하는 마음, 사심이 있으므로 처음의 순수한 목적에서 이탈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 앞에 소중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아무런 사심 없이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고 주님만을 높일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릴 때 자신도 더불어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사심 없이 오직 주의 영광만을 위한 진실한 마음으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의 일을 이루는 동역자들이 나보다 더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중심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자신의 기득권도 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큰 마음이지요.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더 드러낼까'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없고 오직 주의 영광만 구하는 사람'의 마음이지요.
각 분야에서 새로운 일꾼이 세워질 때도 모든 사람이 세례 요한과 같은 마음을 갖는다면 모든 분야가 화평함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사명을 받게 될까'에 연연하기보다 정녕 아버지 나라와 주의 영광을 위해서 나보다 나은 사람이 머리로 세워지길 바라는 마음이 되어야 하지요. 이것은 주의 일에 대한 열심이 없거나 식어져서 뒤로 물러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설령 나보다 못한 사람이 머리로 세워졌다 해도 그가 충만한 가운데 잘할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도울 수 있는 마음이 선이지요. 정녕 마음이 선하고 장성한 아비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직 믿음이나 능력,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 자신보다 더 드러나게 일을 한다 해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습니다. 자신보다 더 사랑받는다 해도 시기하지 않지요. 아비와 같은 마음이니 그가 사랑 받으면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행여나 경험이 부족하여 실수하지 않을까 하고 그의 부족함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 주시기를 더욱 간절히 의탁하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3시간에 걸쳐 중심의 지극한 선 가운데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모든 사람과 화평했으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냈고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킨 엘리야의 선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이 정녕 주님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린다면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삶 속에서 이러한 선의 말씀들을 지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하고 영광스럽게 주님을 맞으며 주님의 품에 기쁨으로 안기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