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24과 사랑은 오래 참고

읽을말씀 : 고전 13:7
외울말씀 : 고전 13:7

일반적으로 오래 참음이라 하면 많은 시간을 지루함 속에서 기다리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영적인 오래 참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대를 생각하므로 수년을 분초와 같이 보냈다"는 고백처럼 진실한 사랑은 그리움이 컸던 만큼, 기다림의 세월이 길었던 만큼 만났을 때의 기쁨과 행복 또한 크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기다림의 시간 동안 느꼈던 외로움과 아픔이 오히려 더욱 진한 사랑으로 승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향하신 사랑하심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참자녀를 얻기 위해 천 년을 하루같이 여기시며(벧후 3:8) 오래 참아 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쳐 베풀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 사랑의 여러 부류
   
   세상에는 다양한 사랑의 표현이 있는데 똑같이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그 사랑의 깊이와 정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진정 상대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마음에 맞춰 주지 않으면 이내 미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상대가 사랑할 만한 사람일 때는 자신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었으나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으면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도 있지요.
   심지어 "당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상대를 힘들게 하고 고통을 안겨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도록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사람도 상대가 변심하면 사랑이 미움으로 변해 상대방뿐만 아니라 그 가족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육적인 사랑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의 범주에 결코 들어가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은 바로 영적인 사랑입니다.
   영적인 사랑의 정의는 고린도전서 13:4-7에 잘 나와 있는데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사랑의 정의에 얼마나 합당하게 행하는가를 정확히 측정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은 이룬 정도에 따라 1%에서 100%까지 나눌 수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을 이제 깨달아 행하기 시작한 것을 1%라 하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의 차원에 이른 것은 100%에 다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계명을 다 지킨다면 하나님의 사랑의 차원에 100%에 가까운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1% 지키면 1%만큼, 20% 지키면 20%만큼, 50% 지키면 50%만큼 사랑이 임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을 이룬 만큼 주어지는 은혜와 은총도 다르며 권능 또한 다르게 나타납니다(요 14:21).
   
   2. 영적인 사랑의 기초가 되는 오래 참음
   
   그러면 고린도전서 13장의 영적인 사랑의 정의에서 오래 참음이 가장 먼저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을 100% 이루기 위해서는 오래 참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래 참음이 부족하여 10%만 이루고 더 이상 진전이 없다면 그 이룬 만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겠지만 그 이상의 차원에는 이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10% 이루었다면 10%만큼 하나님 앞에 사랑과 은총을 입겠지만 나머지 90%는 원수 마귀 어둠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래 참음은 우리 곧 피조물의 입장에서 오래 참음이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오래 참음이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모든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래 참음에는 세상에서 말하는 참음과 영적인 참음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참음이란 화가 날 일이 생겼을 때 억지로 화를 누르며 참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참음은 악 속에서 참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참음 곧 하나님의 오래 참음은 이 같은 참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악이 전혀 없으시므로 참을 일이 없으시지만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오래 참으신다고 표현한 것뿐입니다.
   우리도 선과 진리 가운데 참고 참아서 악을 없애고 악을 빼내 버리면 모든 것이 이해되고 용서가 되므로 참을 일이 없어지는데, 하나님의 오래 참음은 이런 종류의 오래 참음인 것입니다.
   
   3. 모세를 통해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오래 참음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그를 택하셨고 그가 태어나자마자 지도자로서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궁중에서 애굽의 학술과 철학, 건축과 문학 등을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행 7:22), 이는 한 민족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지도자의 역량을 키우는 밑거름이 되었지요.
   그런데 모세가 40세 되었을 때 동족애에서 비롯된 의분으로 애굽인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남방 미디안으로 피하여 제사장 이드로의 집에 체류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40년 동안 양치는 목동으로서 처가살이를 하였는데, 이는 화려한 궁중생활에 비하면 너무나 비천한 생활이었습니다. 모세의 나이가 80세 되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러 종살이하는 백성들을 출애굽시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 공주의 아들로 있을 때 부르시지 않고 그 후 많은 연단의 세월이 흐른 뒤 평범한 목동으로 있을 때 부르신 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오래 참으심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 공주의 아들로 있을 때에도 그가 가진 외적인 조건들은 지도자로서 자격이 충분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당시 그는 자신의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임의로 사람을 죽이는 나약한 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때 모세를 쓰셨다면 모세는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과 능력을 의지하여 자신의 뜻대로 이루려 했을 것입니다. 이를 아신 하나님께서는 40년을 더 기다리셨습니다. 모세가 자기 의와 모든 교만을 깨뜨리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기까지 지켜보며 기다리셨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 말과 행사가 능한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겸비한 마음으로 지극히 낮아진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낮아진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장정만도 60만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수많은 백성들을 친히 이끌어 가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이 나는 등 이모양 저모양으로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도(출 15:22-26) 원망과 불평을 일삼는 것을(출 16:2-3) 보면서 오래 참으시며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번은 모세가 40일 동안을 금식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십계명을 기록해 주신 증거의 두 돌판을 들고 내려와 보니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노하여 손에 든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 버리고 말았지요.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승한 사랑을 이룬 것을 아셨지만 하나님께 받은 돌판을 깨뜨렸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다시 금식하게 하심으로 이제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명백히 말씀하실 수 있는 온전한 차원으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가 더욱 온전해지기를 원하시기에 이처럼 인내하시며 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모세 한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지도자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시며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4. 영적인 오래 참음을 이루려면
   
   그러면 우리가 영적인 사랑의 차원에 들어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오래 참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 고린도전서 13:7에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소망중에 모든 것을 믿으면 모든 것을 견딜 수 있게 되어 오래 참을 수 있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3:4 전반절에도 오래 참음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이는 내가 사랑을 베푸는데도 돌을 던지는 사람에 대해, 또한 내게 오는 시련과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에 대해 오래 참는 개인적인 입장에서의 오래 참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에 모든 것을 참는다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에 나와 있는 진리의 말씀과 위배되는 것, 다시 말해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온유하지 못한 것, 투기하는 것, 교만한 것, 무례히 행하는 것,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 성내는 것,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 불의를 기뻐하는 것 등 이러한 모든 것을 참는 것을 말하지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그냥 참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처럼 믿음 안에 소망을 이루고 소망 안에서 사랑을 나누게 되니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모든 것을 믿는 것이 사랑일까요? 예를 들어, 육적인 사랑을 놓고 보아도 부부간에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서로를 믿고 신뢰하며 존중해 주려 할 것입니다. 설령 의심할 만한 경우에 처한다 해도 우선은 선으로 바라보며 믿어 주려 하는데, 이는 믿음 자체가 곧 사랑한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지만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구원의 은총을 입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상대방이 비록 부족할지라도 그의 모든 것을 믿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이러한 사랑으로 상대를 믿어 줄 때 또한 모든 것을 바랄 수 있는 것이지요. 아무리 가능성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의 성공을 빌어 주고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 상대방도 더욱 힘을 얻어 달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모든 분야를 진리 안에 오래 참음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 안에 깃들어서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