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4:18을 보면 사랑이 있는 곳에는 두려움이 없고 두려움이 있다면 그만큼 사랑이 없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받을 형벌이 없으므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진정 마음 중심에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치 봄에 따뜻한 햇볕을 받아 대지에서 새싹이 돋고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사랑의 싹이 돋아나고 더욱 온전한 사랑으로 성숙해 가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아직 두려움이 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두려움이 있는 이유
1) 두려움은 범죄로 인해 오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인류 역사에 죄가 들어오게 된 과정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께서 따로 창설해 주신 아름다운 에덴 동산에서 각종 나무 실과를 먹으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아무 부족함 없이 살았지요.
그런데 간교한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아담은 죄로 인한 수치감으로 자기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며 나뭇잎으로 가리고자 했습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죄가 들어오니 이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런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러자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하지요. 전에는 다정하고 부드러웠던 하나님의 음성이 죄를 짓고 나니 두려움으로 임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아담은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게 되었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저주받은 땅에서 수고하며 고달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죄의 삯은 사망이요, 죄인에게는 두려움이 찾아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2)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만큼 두려움이 임하게 됩니다
이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지요. 그들은 모세를 지도자로 하여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베풀어지는 열 재앙을 보았습니다. 또 지팡이를 내어미니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을 치니 물이 나오는 역사도 체험했으며, 험난한 광야길에서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받았고 메추라기와 만나로 먹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기도 했지요.
그러나 막상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자 어떻게 행하였습니까?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광경이 나오는데, 그때 백성들은 다 두려워 떨며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향해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했지요.
이런 백성들과 달리 모세는 오히려 두려움에 떠는 백성들을 진정시키며 말하기를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멀리 섰고 모세만이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까이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와의 사이에 왜 이러한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요? 바로 백성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기는 했지만 마음으로 믿지는 못했던 반면에 모세는 정녕 마음 중심에서 믿었고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그만큼 악이 없고 성결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불평하고 모세를 원망하며 하나님을 대적했지만, 모세는 범죄한 백성들이 진멸당할 위기에 놓이자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걸고 그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리지요. 그만큼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모세였기에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룰 수 있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보기도 했던 것입니다.
3) 두려움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해 그만큼 알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이러한 예로는 구약 성경에 기록된 욥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욥기 1:1에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늘 성결케 했으며 잔칫날이면 혹시 그 자녀들이 잔치를 즐기는 중에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하여 자녀들의 수대로 번제를 드릴 정도로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행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러나 욥이 이렇게 행했던 것은 하나님을 사랑해서라기보다는 두려움으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욥기 3:25을 보면 재앙을 만난 후에 욥이 고백하기를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하지요. 곧 축복을 넘치게 받던 중에도 욥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혹 내게 재앙을 주시지는 않을까'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욥기 2:10을 보면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면서 하나님을 오해하여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욥의 말이 옳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여기며 섬길 수 있겠습니까?
욥은 진리를 온전히 알지 못했고 하나님에 대해 지식적으로 알기는 하지만 직접 체험한 바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이나 사랑을 헤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오해하며 두려워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욥을 참된 사랑의 차원으로 이끄시기 위해 연단을 허락하셨습니다. 결국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참사랑을 깨닫게 된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하는 고백을 드리게 되지요.
예전에는 전해 들은 지식에 의해 두려움의 하나님으로 알고 섬겼는데 이제 직접 만나고 체험하니 사랑의 하나님인 것을 깨닫게 되었고,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니 이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온전한 사랑을 이루면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으니 하나님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모하면서 항상 설레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모든 죄가 대속되는 길이 열려 있기에 사랑이 임하는 만큼 두려움이 물러가는 것이요, 온전한 사랑을 이루면 두려움이 조금도 없는 것이지요.
2. 두려움이 없는 온전한 사랑을 이루려면
요한일서 5:3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요, 그의 계명들을 지킨다는 것은 성경 66권 말씀을 지켜 행하고 사랑으로 완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가 부탁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 주고자 할 것입니다. 설령 어렵고 힘든 것이라 해도 사랑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해 주게 되는데,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기쁨으로 순종하게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미운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한다는 것은 곤욕이지만 사랑하는 사람, 음성이라도 듣고 싶어 늘 사모하며 기다리던 사람과 함께한다면 하루 종일 걷는다 해도 다리가 아픈지조차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조금도 힘들지 않고 오히려 그 자체가 행복이요 기쁨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지켜 나가는 만큼 두려움이 사라지고 진리 안에서 강하고 담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온전한 사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때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두려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실 주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지요. 더욱이 우리에게는 돌아갈 본향인 천국이 있으니 이 세상에서 육의 생명이 끝난다 해도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정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되 두려움이 없는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하나님 보시기에 더욱 값지고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