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의 유래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수많은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와 잎을 흔들며 "호산나" 하고 예수님을 환영했던 날입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과 말씀의 권세를 체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스라엘의 구원자라 생각하며 소망에 부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의 압제를 물리치고 다윗의 시대와 같이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해 주시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기대가 무르익는 가운데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보았고, 수많은 무리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왕이신 예수님을 환영했던 것입니다. 정녕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왕이십니다. 그러나 이 날로부터 한 주간도 지나지 않아 왕의 이름을 높이며 환호하는 소리는 사라지고,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성난 군중들의 외침이 울려 퍼졌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주위에는 왕을 경배하며 찬양하던 백성들이 사라지고 욕하며 조롱하는 무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흔들며 소리높여 환호하는 이 날이, 실상은 곧 다가올 참혹한 고난이 시작되는 첫날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은 금요일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고난을 기리는 고난주간의 첫날로서, 고난주일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고 죽으셔야 했을까요?
2.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셔야 했던 이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 의해 온갖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이유는 죄인이었던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무수한 영혼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섭리이지요.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는 원죄를 가진 죄인으로 태어났으며 살아가면서도 많은 죄를 짓습니다. 로마서 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 기록된 대로, 영계의 법칙에 의하면 공의에 따라 모든 죄인은 반드시 사망의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창조주이시지만, 모든 것을 주관하심에 있어서 철저한 공의를 좇아 행하십니다. 그러기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법칙을 어기지 않고 죄인들을 구원할 방법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 방법은 바로 누군가 죄 없는 사람이 죄인들의 죄 값을 대신 치러 주는 것인데, 모든 사람들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원죄와 자범죄를 갖고 있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죄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아담의 후예로 태어나신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정자와 난자를 통해 잉태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에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원죄가 없으시지요. 또한 태어나서부터 온전히 율법을 지키시므로 자범죄도 없으셨습니다. 원죄도 자범죄도 없으시므로 죄인들의 죄를 대속할 자격이 있으신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어 주신다면 죄인들이 구원받아 천국에 간다 해도 공의의 법칙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죄인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죄 없는 예수님의 생명을 대신 내어줌으로써, 구원의 대가가 지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이러한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서는 상상할 수 없는 큰 사랑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혀 죄가 없어서 죄인들을 대속하실 자격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다면 결코 죄인들을 위해 사망의 형벌을 당하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을 대신해서 받아야 하는 사망의 형벌은 결코 감당하기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온몸에 채찍을 맞아 피를 흘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셔야 했고 벌거벗긴 채 십자가에 달리며, 손과 발에는 못이 박혀야 합니다. 채찍에 맞은 상처와 못박힌 상처에서 피를 흘리며 여러 시간 동안 참혹한 고통을 겪다가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러한 사망의 형벌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공의의 법칙에 따라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셨고, 일평생 가난한 삶을 사심으로 가난을 대속해 주셨습니다. 그 대신 우리에게는 부요함을 누릴 수 있게 축복의 길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온몸에 채찍을 맞아 피 흘리며 찢기심으로 우리의 모든 질병을 대속하셨습니다. 가시관에 찔려 얼굴에 피가 낭자하신 것은 우리가 마음과 생각으로 지은 모든 죄를 사하시기 위한 것이지요.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주신 것은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기 위함이며, 손과 발에 못박히고 피 흘리신 것은 우리의 행위로 범한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희생에 감사하거나 예수님을 믿어드린 것이 아닙니다.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맹세했던 제자들도 막상 예수님께서 잡혀 고난당하실 때는 대부분 두려워서 숨고 말았지요. 천국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시며 오직 선한 일만 해 주셨는데, 군중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욕하고 침 뱉으며 조롱합니다.
이처럼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구세주를 멸시하고 대적하는 죄인들을 위해 오히려 용서를 빌어 주셨고, 이후에라도 믿고 구원받을 수 있기를 바라므로 물과 피를 다 쏟아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녕 십자가는 고통과 수치의 상징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이 바로 인류를 구원하는 길이요 승리와 영광을 얻으시는 길이었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여 구세주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사망의 형벌을 대신하여 받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사망의 형벌을 받으셨다 해도 아무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믿을 때 죄사함을 받게 되며 부활하신 주님과 믿음으로 연합하여 하나가 됩니다. 이렇게 주님과 하나가 되면 원수 마귀 사단의 사망 권세에서 풀려나고 장차 우리도 주님과 같이 부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셨던 예수님처럼 주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도 십자가를 바라볼 때 더 이상 두려움과 고통으로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난의 너머에 있는 구원과 생명을 볼 수 있게 되고, 고난의 대가로 주어지는 천국의 영광을 볼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이미 앞으로 되어질 모든 일들을 알고 계셨습니다. 어느 때에 어떻게 잡히시는 줄도 아셨고 십자가의 고난이 얼마나 참혹한 것도 아셨지요. 만세 전에 감추어진 섭리 가운데 인류 구속을 완성해야 하는 중한 짐을 지셨고 더구나 참혹한 형벌을 감당해야 하기에 이 일을 이루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마음에는 잠시도 온전한 쉼이 없으셨습니다.
누가복음 22:42을 보면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셨지요. 이처럼 기도하실 때 차가운 기온에도 불구하고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처럼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부르짖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8:11에 보면 마침내 때가 되어 잡히시게 되자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말씀하시며 잡으러 온 사람들의 손에 잡혀 가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매순간, 항상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기억하시며 어떤 고통과 희생이 있더라도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뤄 드리기만 간절히 바라셨던 것입니다.
3. 주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우리들의 마음가짐
요한일서 4:19을 보면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말씀하셨는데, 세상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주님과 같은 사랑을 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그 참혹한 십자가에 달려 주셨는데, 우리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십자가를 대하시는지요. "내가 주를 위해 무엇이나 할 수 있나이다." 고백하며 죽기까지 충성할 수 있으신지요? 생명을 드려야 하는 것도 아닌데, 작은 유혹조차 버리지 못하여 범죄하거나 주님께서 맡겨 주신 양 떼보다 내 가족과 내 소유를 더 귀하게 여기는 분은 없으신지요?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면 주님께서 그토록 싫어하시는 죄를 버리게 되고 형제를 내 몸같이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의 피 값을 찾아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한 열정이 불타게 되며 원수를 위해서도,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오직 긍휼의 기도를 올리며 용서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주님께서 가신 길이요, 하나님의 뜻인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정녕 예수님의 고통과 그 안에 담긴 사랑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시며 날마다 더한 사랑의 고백과 행함으로 주님께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길을 가실 때 죄로 물든 영혼들에 대한 긍휼과 아버지에 대한 사랑만을 품고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걸어가셨습니다. 주신 사명을 이뤄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하며, 오히려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시고, 지금 당하는 고통을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을 것을 생각하며 마음에 위로를 받으셨지요.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날마다 여러분의 마음에 더욱 깊이 새기며 남은 날 동안 불같은 열정으로 주를 위해 헌신함으로 장차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7-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