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3과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읽을말씀 : 롬 3:19-22
외울말씀 : 롬 3:20

1. 율법의 행위로 외식하는 사람들
   
   마태복음 23:13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하시며 연이어 일곱 번이나 책망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처럼 엄히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율법의 행위만 앞세우는 외식주의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3:5-7에는 외식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나오는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외식주의자들은 외모를 그럴 듯하게 꾸며서 사람들에게 높임받는 것을 좋아했고, 또한 잘되는 사람들을 보면 미워하며 끌어내리려고 하는 등의 악을 행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행위만 앞세우는 외식주의자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외식'이란 겉모양은 행하는 것처럼 꾸미고 있으나 속에는 하나님의 뜻에 위배된 모습들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열심히 가르치는 그들은 겉모양은 거룩한 것 같고 말씀대로 행하는 것 같지만 중심에서는 행치 아니했고 그 속은 노략질하는 이리와 같았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일꾼이나 직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알면서도 여전히 미워하고 죄 가운데 살며 불순종하는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므로 오히려 진리 가운데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까지 실망시키고 낙심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2. 율법의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할례
   
   마태복음 3:7 이하에는 세례 요한이 외식주의자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하면서 엄히 책망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무리 겉이 깨끗한 그릇이라도 그 안에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면 아름답다고 할 수 없으며 음식을 담아 먹을 수도 없는 것처럼 율법의 행위로는 거의 흠잡을 것이 없다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단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23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먼저는 의와 인과 신이 있어야 하고 아울러 행함도 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의와 인과 신을 이루는 것이란 곧 마음의 할례를 말하며 이것이 율법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진정 하나님을 믿는다면 반드시 마음의 할례를 이루어 사랑과 희생, 섬김의 마음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의 의를 이루지 못하고 단지 행위적으로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마 7:21).
   
   3. 율법을 잘 지키는 것 같은데도 축복받지 못하는 이유
   
   그러면 행위적으로는 율법을 잘 지켰을지라도 축복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육과 영을 구분할 수 있도록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막상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이내 마음이 불편해지고 입술에는 원망 불평 탄식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너게 되었을 때에는 춤추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지만, 막상 어려움이 닥칠 때에는 이내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써 전도하고 충성 봉사하며 각종 예배에 참석하면 열심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아무리 행위적으로 잘 지킨다 해도 중요한 것은 영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믿음을 잘 지켜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이내 마음이 불편해지고 원망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아직 영이 아닌 육에 거하고 있으며, 그동안 쌓아온 것들이 행위적인 발전일 뿐 정작 중요한 마음의 의는 이루지 않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 같은데도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고 기도해도 응답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육은 언젠가는 변하는 것이며 결국 안개와 같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신다 해도 그 기쁨과 감사는 순간일 뿐, 시간이 지나면 변하기 때문에 응답이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2) 자신은 율법을 지키는 데 반해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하는 것 같아 상대를 판단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말씀대로 산다고 생각되므로 혹 누가 주일을 지키지 못하거나 기도하지 않거나 문제를 일으킨 것을 보면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고 정죄하여 이웃에게 알리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제들을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약 4:11-12), 스스로 어기면서 오히려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생각하지요.
   많은 사람들이 행위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것 같지만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되 용서할 사람만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가 죄를 범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며(마 18:21-22) 원수라도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해 주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5:44).
   그러니 자신이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 그렇지 못한 상대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누구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을 보면 악한 말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선한 말로 권면하여 돌이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3) 율법을 행위적으로는 잘 지키는 것 같지만 자기 마음과 생각에 맞지 않으면 쉽게 분내고 다투며 원수를 맺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과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분내지 말라, 다투지 말라, 원수 맺지 말라" 교훈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말씀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주일을 지키고 기도하는 등 자기 위치를 지켰다고 해서 온전하게 지킨 것이 아니요, 그것은 율법적인 행위에 그칠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에는 분냄과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서도 자신은 율법을 잘 지켰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외식하는 사람이란 회칠한 무덤처럼 겉은 아름다우나 속에는 썩어 냄새나는 시체가 들어 있고, 또한 겉모습은 양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들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데, 죄를 품고 하는 기도에 응답을 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시 66:18).
   마태복음 5:39 이하를 보면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과 생각에 맞지 않고 자신이 불이익을 당했다고 해서 분내고 다툰다면 이는 영이 아니라 육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21에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말씀하셨으니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는 것이 아니요, 영적인 율법은 오히려 긍휼과 사랑과 용서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킨다' 하면서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용서하지 못하고 분내고 다툰다면 아니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비록 행위적으로는 기도나 봉사, 충성이 있다 해도 근본 마음이 개선되지 않으면 응답이 올 수 없습니다. 진정한 행함의 의는 마음이 개선되어야 나올 수 있으므로 먼저는 마음의 할례를 하되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리의 마음으로 개선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진정한 의를 이루어야
   
   우리는 주변에서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은 경우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무슨 특별한 악을 행한다거나 언뜻 보기에 별로 위배된 것이 없으므로 자신은 온전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진리로 비추어 보면 그 속에는 율법과 자기 중심으로 차 있기 때문에 마음의 개조도 안 된 채 다만 습관적인 신앙에만 머물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미지근한 신앙과 같아서 차라리 차가운 신앙보다도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계 3:16). 왜냐하면 차가운 경우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철저히 돌이켜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올 수도 있지만 미지근하면 아예 깨달을 수도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런 사람이라도 마음이 개선되어 영의 사람으로 변화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나가는 가운데 자기 마음과 생각에 맞지 않는 문제가 생겨난다 해도 이내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입해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전에는 문제를 이웃에게 알리고 판단 정죄했을 터인데, 이제는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마음이 선한 요셉은 마리아와 정혼하고 서로 몸을 가까이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리아가 잉태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 사실을 사람에게 알리려 한 것이 아니라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차원으로 대입해 들어가니 어떤 옳지 못한 일을 보았다 해도 사람들에게 알리고 상대를 해코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끊고자 하는 아름다운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영으로 일군 만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섬기고 낮아지는 사람,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진리로 개간된 마음으로 기도할 때 곧 응답이 오며, 이미 쌓아 놓은 기도도 신속히 응답이 되어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빛 가운데 행하는 영의 사람들이 되어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1-21